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린든 B. 존슨 (문단 편집) === 대통령이 되기 전 === [[파일:린든 B.존슨 리즈시절.jpg]] 청년 시절. [[텍사스]] 중부의 작은 시골 마을에서 태어났다. 텍사스 농촌 스타일의 소박한 인물로 알려져 있으나, 사실 그의 집안은 지역 유지이고 재산도 꽤 많았다고 한다.[* 실제로 존슨은 역대 미국 대통령 보유 자산 순위 6위로 상위권에 속한다.]그의 고향 근처의 존슨시티라는 도시는 그의 집안의 이름을 딴 것이다.[* 다만 아래에도 나와 있듯이 집안 재산과 별개로 성격만은 좋게 말해 소탈하고 유쾌한 텍사스 농부였다.] 외가도 꽤 알려진 집안으로 외증조부는 저명한 침례교 [[목사]]이자 교수로 베일러 대학교 총장을 지냈고, 외조부인 조지프 윌슨 베인스는 텍사스 주무부 장관과 주의회 의원을 지낸 정치인이었다. 그의 미들네임 베인스는 외가의 성씨를 따온 것. 아버지 새뮤얼 일리 존슨도 주의회 의원을 지낸 정치인이었고, 샘 레이번 하원의장 등 텍사스 출신 유명 정치인과도 줄이 닿는 사람이었다. 그 덕분에 젊은 학교 교사였던 존슨은 민주당에 들어간 후 승승장구하며 거물로 성장하게 된다. 린든 존슨은 후에 본인의 이름을 따 린든 B. 존슨 고등학교로 불리게 되는 존슨 시티 고등학교를 1924년에 졸업하게 된다. 졸업년도와 생년월일을 보면 알겠지만 당시 반에서 제일 어렸다고 한다. 졸업 후 2년 가량은 [[캘리포니아]] 남부로 이사하여 친척 일을 도왔다, 이후 텍사스로 돌아와 샌마르코스에 있는 사우스웨스트 주립 사범대(현 텍사스 주립대학교)를 졸업하고 교사 자격증을 얻었다. 이에 따라 텍사스 남부 시골마을에서 초등학교 [[교사]] 생활을 했었다. 미국 대통령 중에서는 특이하게 정계 입문 전 직업이 교사였던 이색적인 경우. 이때 가난한 학생들의 열악한 환경을 목격했고, 당시의 경험으로 후에 공립학교에 대한 대대적 재정지원 정책의 필요성을 느낀다. 이후 짧은 교사 생활을 뒤로 하고 아버지를 따라 민주당에 들어가 1930년 하원의원 출마자의 선거운동을 하며 정치를 익히기 시작했다. 1936년 대통령 선거에서는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 선거운동을 하며 텍사스 민주당 청년조직을 이끌었다. 또한 텍사스 출신인 [[존 낸스 가너]] 부통령을 도왔고, 당시 전국구급으로 떠오른 텍사스 출신 하원의원 [[샘 레이번]]도 도왔다. 1936년 선거에서 루스벨트와 가너는 재선에 성공했고, 샘 레이번은 하원 민주당 원내대표가 되어 집권 여당 대표로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1937년, 텍사스 연방하원의원 10번 선거구 의원이 사망하면서 열린 보궐선거의 민주당 후보로 존슨이 공천되었다. 주도 [[오스틴(텍사스)|오스틴]]이 포함된 비중있는 선거구였다. 존슨은 만 30세도 되기 전인 젊은 나이에 연방 하원의원이 되었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뉴딜]] 정책 문제로 알력이 있던 텍사스 출신의 가너 부통령을 견제하는데 텍사스 출신의 젊은 의원인 존슨을 적합한 인물로 보아 존슨의 든든한 지원자 역할을 했다. 1940년, 그의 정치적 스승인 샘 레이번이 권력서열 3위인 하원의장 자리에 오르면서 존슨은 레이번의 측근으로도 승승장구하게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때는 [[미합중국 해군]] [[장교]]로 복무, [[소령]]으로 전역했다. 존슨은 상원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전국적으로 이름을 떨치는 거물 정치인이 되었다. 1955년 민주당 상원 원내대표가 되어, 야당 대표 자격으로 [[아이젠하워]] 대통령과 협력했다. 당시 민주당 상원 원내대표로서 린든 존슨이 보여준 리더십과 정치기술, 협상력과 타협술은 미국 의회 역사에서도 손꼽힐 정도여서 존슨은 "나는 내 아내만큼 의회를 잘 알고있다"고 농담하기도 했다. 또한 인종주의가 남아있던 남부 출신이면서도 흑백 인종분리에 반대했고 [[연방 민권법]]안이 통과되는데 기여하였으며, 미국의 정교분리를 명확히 한 수정헌법의 발의 및 통과를 주도했다.[* 실제 내용은 면세혜택을 받는 교회 등 비영리단체의 정치활동 참여 및 정치적 발언을 금하고, 만약 위반시 면세혜택을 박탈하는 것. 이는 교회의 정치참여를 제한하려 했던 것은 아니었다는 게 전문가들의 일반적인 견해다. 오히려 국가, 혹은 정치의 교회 개입을 막고자 함이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성과를 바탕으로 1960년 대통령 선거의 유력한 민주당 후보로 떠올랐다. 경선에서 [[존 F. 케네디]]와 [[이전투구]]를 벌였다. 케네디는 존슨에 비해 정치 경력은 보잘 것 없었지만 그의 젊은 이미지는 돌풍을 일으켰고 마침내 케네디가 대선 후보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케네디는 자신이 취약했던 남부의 표를 끌어들이기 위해 존슨을 부통령 러닝메이트로 선택했고,[* 이는 가톨릭 신자로 보수적인 남부 표를 얻지 못할까 우려한 케네디가 남부 출신의 존슨을 끌어들인 것이란 분석도 있다. 또는 케네디의 비서 이블린 링컨은 1993년 인터뷰에서 존슨이 후버로부터 얻은 케네디의 여성 편력 관련 증거물을 가지고 자신을 부통령 후보로 지명하도록 협박했다고 얘기하기도 했다.] 존슨은 앙금을 풀고 케네디를 적극적으로 보좌하며 선거운동을 해 이들은 11월 8일 선거에서 [[리처드 닉슨]]에게 신승하며 그 다음해 초 대통령-부통령에 취임한다. 존슨은 [[텍사스]] 출신으로는 [[존 낸스 가너]]에 이어 2번째로 부통령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3번째는 [[조지 H. W. 부시]]. 조지 H. W. 부시에게 [[텍사스]]는 나고 자란 실제 고향은 아니지만, 20대 때 텍사스로 건너온 이후 줄곧 텍사스를 기반으로 활동했기 때문에 텍사스가 정치적 고향인 텍사스 출신 부통령이 된다.] 그러나 케네디는 존슨을 신뢰하지 않았고, 신뢰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측근이자 동생인 로버트 케네디에게 존슨 뒷담화를 깔 정도로 존슨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 결과 부통령 시절 존슨은 케네디가 살아있는 동안 국정의 핵심 현안에는 거의 관여를 하지 못했다. 물론 존슨만 그런게 아니라 역대 미국 부통령 중 다수는 정책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못했던 경우가 많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